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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디 같이 나아갑시다.
작성자 postershop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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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2-03-02 16: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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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71

나는 오래도록 혼자 살아왔습니다. 누군가의 간섭을 지나치게 힘들어하는 나로서는 이것이 자유고,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따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나와 대화를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계속해서 알아나갔습니다. 그렇게 나만의 몇 가지 행동 리스트가 생겨났는데, 여태 그에 따라만 행동했고 큰 불만 없이 살아왔다 생각합니다. 일정한 루틴이라 하겠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는 좀처럼 쉬이 잠들 수가 없어졌습니다. 잠에 들 수가 없었다기보다 사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루틴에 어긋날 리 없는 내일이 싫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더 이상 설레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루틴은 단순히 빨래를 하루 미루고, 좋아하지 않던 장르의 영화를 본다 해서 깰 수 있는 것도 아녔습니다. 하루 내내 침대 위를 벗어나지 않아도 그 누구도 나를 밖으로 끌어내질 않습니다. 사람에게- 무한한 자유는 곧 부자유가 된다는 말을 믿지 않았기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당신과 핀란드에 있습니다. 당신을 안지 이제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까요. 시간이야 중요치 않겠지만 정말 놀랄 따름입니다. 좀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가쁜 것을 주체할 수 없어 잠든 당신을 옆에 두고 이렇게 글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는 여태 지지 않았고, 창밖으로는 푸른 나무들이 서로를 부딪히며 생경한 소리를 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곳을 전혀 모릅니다. 핀란드-라고 입에 머금으면 무언가 정신이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가버리는 것 같아 선택한 것뿐입니다. 마침 비행 편이 있기도 했지만요. 긴 비행에 몸은 꽤 피곤하지만 웃음이 자꾸만 새 나옵니다. 일생을 사형수로 살아오다, 당신이 뚫어놓은 작은 터널을 발견하고 지금 막 탈옥한 심정이라고 하면 믿으실까요. 물론 누군가 잡으러 오지는 않겠지만, 나는 지금도 당신 손 잡고 더 멀리, 멀리 가자고 재촉하고만 싶습니다.

나에게 있어 당신은 혼돈입니다. 여태 피하려고 했던 것들 모두 당신 손에 담겨있는 듯합니다.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어떤 일들의 순서나, 효용을 가늠해보지도 않습니다. 바람이 불었다는 이유로 당신은 무언가 결심합니다. 언젠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쪽 발은 질서에, 한쪽 발은 혼돈에 두고 살야 가야 한다고. 당시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깊게 이해합니다. 우리는 혼돈만으로 살 수도 없고, 질서만으로도 살 수가 없습니다. 어스름한 생각이지만- 나는 사랑이 정확히 그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생각합니다. 서로를 파괴하고, 서로를 다시 가듬어줍니다. 바로 그런 땅 위로 살아있는 생명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부디 같이 나아갑시다. 보잘것없는 질서 속으로, 예상할 수 없는 혼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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