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읽어주세요.
땅조차 꽝꽝 얼어버린 겨울 논 한쪽 구석은 호일에 돌돌 말아둔 고구마나 감자를 서리해온 볏단 아래 넣고 구워 먹기 좋은 장소다.⠀서울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거짓말이라 하지만, 털털거리는 작은 시골 버스가 하루에 딱 2번 다니는 마을 끝트머리에 살았던 나는 더하면 더한 이야기도 해줄 수 있다.⠀그리고 그때를 깊이 그리워하는데, 여기서 정말 그리운 것은 잘 익은 고구마도 아니고, 산 구석구석 헤집으며 따먹던 버찌도 아니다. 바로 시골집에 있던 낡은 욕조이다.⠀자의 반 타의 반 일찍이 타지생활을 시작한 터라 욕조는커녕 정상적인 샤워 시설은 구경도 못 해봤다. 매번 샤워기에서 튄 물들에 변기 옆 휴지가 젖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나마 멀쩡했던 건 기숙사 단체 샤워실 뿐이겠다.⠀어린 날의 낡은 욕조를 떠올리면 누군가 온몸을 안아주는 그런 감촉이 떠오른다. 가득 담긴 물의 표면 위로 올라오는 비린 향이 좋다. 아무 생각 않고 잠겨 듣던 물속 소리도 역시 좋다.⠀그래서 1년 주기로 이사라고 부르기 민망한 이사를 할 때면 어김없이 욕조가 있는 집에 살고 싶다고 투덜거렸다. 그렇게 십 년 가까이 이곳저곳 몸을 뉘었고, 최근에는 운이 좋게도 다시 낡은 욕조가 생겼다. 짐 정리를 채 다 마치지 않았지만 요즘 나는 일을 마치면 첨벙 물 위로 떨어지는 상상을 먼저 한다.⠀바쁜 척 살다 보니 정말 바빠져 버린 삶 속에 쉬는 법을 까먹었다지만, 따듯한 물에 몸을 뉘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 빠르다는 빛도 물속에선 이리저리 휘청이는데 이곳에 잠긴 내 걱정이라고 별수 있을까.⠀이렇게나 좋은 점이 한가득 채워져 있는 욕조가 나를 슬프게 하는 단 한 가지는, 그새 몸이 부쩍 커버려 더는 몸을 한 번에 다 담글 수 없다는 점에 있다.⠀삐죽 튀어나온 못난 무릎을 보고 있자면 이제는 내가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은 쓸쓸함을 느낀다.⠀물속에 머리를 푹 넣어보려 하면 다리가 눈치 없이 쑥 올라오고, 차가워진 다리를 욱여넣으면 또 별수 없이 머리가 불쑥 튀어나온다.⠀다 커버린 나는 이제 무언가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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