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옆에 있던 네게 이렇게 메일을 보내는 게 꽤 어색하면서도, 신선해서 좋다. 그냥 메시지를 남기려 했는데, 넌 잠이 옅으면서도 꼭 알람은 켜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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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정말 우리가 유튜브로 봤던 것처럼 유심칩이나 와이파이도 잘 안되고, 시시각각 변하는 버스 시간표 탓에 (작고 낡은 봉고차를 버스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도착하는 데까지 고생 좀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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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무사히 도착하고, 그새 얼마나 쏘다닌 지 몰라. 너무 열심히 다녔나 바지도 조금 헐렁해진 것 같아. 그때 허리춤에 끈이 있는 거로 꼭 사야 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같이 산 샌들은 이제 버려야 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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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저것 자랑을 한가득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괜히 네 바보같이 웃는 리액션이 생각나 김이 좀 새. 돌아가면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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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나는 그동안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혼자인 시간도 많았어. 내가 가려던 길이 하나일 때도 있었고, 여러 갈래로 나뉜 때도 있었지. 구석에 작게 핀 꽃마저 내가 정말 먼 곳에 와있다는걸 알게 해 줄 만큼 온통 다른 것들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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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혼자 덜컥 떠나버린 여행이지만 나는 이곳에서 자유라는 게 여전히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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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을 그만두고 따라오려는 널 말리고, 설득하느라 진땀뺀 걸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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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 해서 사둔 비행기표를 빼면 나는 어디에도 매여있지 않고, 분명 자유로운 상태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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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일 이곳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 수도 있어. 아니 지금 당장 다른 마을로 떠날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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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새해에 내년에는 어디에 있을까 하고 물었을 때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책상 앞?’ 이라고 했던 것에 비하면 아주 아주 자유로워 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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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장 마냥 네가 전화로 좋냐고 물어보면 한참은 대답을 못 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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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자유로워진 만큼 많은 가짓수의 불안함을 새로이 느껴. 새로운 길 앞에 서 있노라면 별의별 상상이 시작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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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책에서 어떤 인물이 했던 대사가 이제야 이해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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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그는 뾰족한 절벽을 보며 굉장히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는데, 옆에 있던 다른 인물이 그의 표정을 보곤 절벽이 그렇게도 무섭냐고 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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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나온 대답이 바로 ‘절벽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나 자신의 자유가 무섭다.’ 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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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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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지금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내가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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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서움이 금세 불안함으로 자라나 옴짝달싹도 못할 때가 오는데, 그럼 어쩔 수 없이 숙소 안내 데스크로 가 마을이 너무 이쁘다고 너스레를 떨며 하루만 더 묵고 가겠다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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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가 우스운 걸 아니까, 너라도 너무 웃지만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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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떠올려 보면 설레는 마음이 들 때랑, 불안한 마음이 들 때 우리 몸이 똑같이 반응한다는 걸 배웠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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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사람은 불안하고 불안한 만큼 또 자유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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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지 않은 삶은 설레지 않고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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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실 내가 무어라 하는지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넌 나를 잘 아니까 대충 이해했으리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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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이곳의 대중교통들 탓에 이만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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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고 아침 출근길에 이 글을 읽거든 이 보기 드문 자유인에게 존경을 담아 답장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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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