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집 문을 열 때부터. 요란한 도어락 소리 뒤로 모든 게 정적으로 가라앉을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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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짝만 놓여있는 슬리퍼를 신을 때부터. 한 개밖에 없는 물컵에 물을 따를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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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위해 사둔 여벌의 젓가락들 사이로 평소에 쓰던 젓가락 한 짝만 닳아 있는 것을 볼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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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로 이때부터 세상에서 뚝, 떨어져나와 혼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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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너머로 보이는 것은 컴컴한 고요함뿐. 마치 욕조에 안에 푹 잠겨있을 때처럼 마음속 생각이 꽤 크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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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겨질 때를 기다렸다는 듯, 내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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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게 그렇게 불쾌하고 긴장이 된다. 끝끝내 어색한 고요함을 잘 참지를 못하고, 환하게 불을 켜고 곧바로 노래를 크게 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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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듣지 않던 노래가 섞여 나와도 별 신경 쓰지 않는가 하면, 잠에 들 때는 10시간이 넘는 모닥불 영상을 틀어 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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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정적을 피해 다니는 빚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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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리만큼 자신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들키는 게 무서워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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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런 감정이 당황스러워서, 하는 수 없이 외로움이라 이름 붙이고 최대한 많은 약속 사이로 숨어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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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적은 솜씨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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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찾아내어 아무도 없는 테이블로 끌고 간다. 그때는 별수 없다. 쌓여있는 숙제 앞에 괴로워했던 방학 마지막 날처럼 미루고 미뤄왔던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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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어색하면, 차라리 이 앞에 옛날 담당 교수님이, 아니면 우리 팀 부장님이 앉아있는 게 더 낫겠다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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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고 애써 상투적인 인사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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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진다는 게 아이러니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네 기분은 어떻냐고 묻는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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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바탕 설명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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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네 꿈이 무엇이냐, 뭘 원하느냐 따위의 질문은 엄두도 못 낸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아기가 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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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은 많으니 조바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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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라기도 하지만, 더 이상 정적을 피해 도망 다니지 않아도, 감정을 속이거나 구태여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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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조언을, 농담을, 위로를 해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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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도 더는 혼자가 아님을 성큼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