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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적을 피해 다니는 빚쟁이.
작성자 postershop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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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2-03-02 16: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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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07

일을 마치고 집 문을 열 때부터. 요란한 도어락 소리 뒤로 모든 게 정적으로 가라앉을 때부터.

한 짝만 놓여있는 슬리퍼를 신을 때부터. 한 개밖에 없는 물컵에 물을 따를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위해 사둔 여벌의 젓가락들 사이로 평소에 쓰던 젓가락 한 짝만 닳아 있는 것을 볼 때부터.

우리는 바로 이때부터 세상에서 뚝, 떨어져나와 혼자가 된다.

현관 너머로 보이는 것은 컴컴한 고요함뿐. 마치 욕조에 안에 푹 잠겨있을 때처럼 마음속 생각이 꽤 크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혼자 남겨질 때를 기다렸다는 듯, 내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처음엔 이게 그렇게 불쾌하고 긴장이 된다. 끝끝내 어색한 고요함을 잘 참지를 못하고, 환하게 불을 켜고 곧바로 노래를 크게 틀게 된다.

평소 듣지 않던 노래가 섞여 나와도 별 신경 쓰지 않는가 하면, 잠에 들 때는 10시간이 넘는 모닥불 영상을 틀어 두기도 한다.

마치 정적을 피해 다니는 빚쟁이처럼.

당연하리만큼 자신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들키는 게 무서워서였을까?

처음엔 이런 감정이 당황스러워서, 하는 수 없이 외로움이라 이름 붙이고 최대한 많은 약속 사이로 숨어들 뿐이다.

그러나 정적은 솜씨가 좋다.

끝끝내 찾아내어 아무도 없는 테이블로 끌고 간다. 그때는 별수 없다. 쌓여있는 숙제 앞에 괴로워했던 방학 마지막 날처럼 미루고 미뤄왔던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얼마나 어색하면, 차라리 이 앞에 옛날 담당 교수님이, 아니면 우리 팀 부장님이 앉아있는 게 더 낫겠다 생각이 든다.

애쓰고 애써 상투적인 인사부터 시작한다.

당연히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진다는 게 아이러니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네 기분은 어떻냐고 묻는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한바탕 설명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

시작부터 네 꿈이 무엇이냐, 뭘 원하느냐 따위의 질문은 엄두도 못 낸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아기가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시간은 많으니 조바심은 없다.

때로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라기도 하지만, 더 이상 정적을 피해 도망 다니지 않아도, 감정을 속이거나 구태여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는 조언을, 농담을, 위로를 해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혼자여도 더는 혼자가 아님을 성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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